엑쏘세
(Exocet)
1980년 프랑스가 개발한 대함 미사일. 초기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으나, 영국-아르헨티나간에 벌어진 1982년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군의 프랑스제 슈펠 에텡다르 전투기가 단 1발의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의 최신예 구축함 셰필드호를 격침시킨 일로 인하여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고도측정계를 내장하고 수면위 1~3m의 높이로 스치듯이 비행하여 목표를 공격하는데, 우수한 유도 성능을 가지고 있으나 하푼 등에 비하면 사정거리가 비교적 짧다는 것이 흠이다. 일반적으로 헬기, 전폭기 등에 장착하여 발사하는 공대함 미사일로 운용되나 이집트 해군처럼 고속정에 장비하여 함대함 미사일로 운용하기도 하며, 한국군의 경우도 포항급 초계함의 초기형 모델 4척에 MM38형 엑조세 미사일(사정거리 42km)을 장비하여 함대함 미사일로 운용하고 있다. 길이 4.69m, 지름 35cm, 중량 650kg, 속도 마하 0.93, 사정거리는 약 40~65km이다. MM38형과 MM40형의 두 가지 모델이 있다
엠1전차
(M1 Abrahms Tank)
미 육군과 해병대의 주력 전차. 독일과 공동으로 개발하던 MBT 70계획이 무산된 뒤 독자적으로 개발한 전차로, 1980년부터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가스터빈 엔진을 사용한 전차이며, 초기모델은 105mm 강선포를 주무장으로, 7.62mm 기관총 2문과 12.7mm 기관총을 부무장으로 장착하고 있었다. 1985년부터 배치된 개량형의 M1A1은 주포를 120mm 활강포로 바꾸어 파괴력을 크게 강화하였으나 탄약 적재수는 55발에서 40발로 감소하였다. 또한 화생방(NBC)방호 시스템을 추가하고 광학조준경과 열상조준경을 탑재하여 야간사격 능력을 강화하였으며, 기존 모델에 비해 방어력을 높였다. 전투중량은 기존의 54.5톤에서 다소 증가한 57.1톤이 되었고, 최고속도는 72km/h에서 66.8km/h로 감소하였으나 야지기동속도인 48.3km/h는 유지하고 있다. 이를 더 개량한 M1A2에는 헌터 킬러 기능이 탑재되어 있으며 이외의 주요 성능개량 분야는 2세대 열상장비 적용, 고해상 전시기 적용, 지휘통제 기반구조 보강, 전차내부 설치용 보조동력장치 장착, 대용량 고속 메모리 장착 등이다. 전투중량은 63.1톤으로 늘었으나 최고속도는 오히려 67.6km/h로 증가하였으며, 작전반경도 기존의 M1A1 수준(449.19km)을 유지하고 있다.
여단
(團, Brigade)
지상군의 편성단위 중 한 가지. 사단보다는 작으나 연대보다는 큰 단위이나, 사단과 연대의 중간단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편제부대로써 독립된 전술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이다. 일반적으로 2개 이상의 단 혹은 연대로 구성되며 최근에는 수개의 보병대대를 기간으로 하여 편성하기도 한다. 기갑, 포병 등 단일병과의 부대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독립부대 또는 야전군 및 군단의 직할부대나 사단 예하의 부대로서 운용된다. 여단의 지휘관은 일반적으로 준장급의 장성이 맡게 된다.
여수순천사건
1948년 10월 20일 국군 제 14연대에 소속되었던 좌익계열 군인들의 주도로 제 14연대 주둔지였던 전라남도 여수에서 일어난 반란사건을 가리킨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발생하였고 이는 곧 유격전화되었다. 이에 군과 경찰은 합동으로 진압작전을 진행하였고, 10월에 들어 유격대의 공세가 강화되자 여수에 주둔중이었던 제 14연대 1대대 병력을 증원으로 제주도에 급파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에 공산당 지하조직원이었던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 지창수 상사 등이 주도하여 동족을 칠 수 없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20일에 여수를 장악하였고,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 4연대의 1개 중대가 진압군으로 출동하였으나 부대 내의 좌익계 사병들이 장교를 사살한 다음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20일 오후 3개 부대로 재편성한 반란군은 주변 지역의 장악에 나섰으며, 21일 정오를 전후해서는 여수, 순천, 보성, 광양의 거의 전 지역과 하동, 남원, 구례, 곡성 지역의 일부 지역이 반란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 당국은 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하여 진압을 위한 부대로 제 3, 4, 6, 12, 15연대 등을 투입하였고 22일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진압작전에 나선 정부군은 22일 순천을 점령하였고, 해군 함정으로 여수항을 봉쇄하고 항공기를 동원하는 등의 육해공 입체작전까지 수행하는 격전 끝에 27일 여수를 점령하여 반란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잔류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퇴각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무차별 사격을 비롯한 진압군의 무리한 소탕작전과 부역자 색출 및 보복테러 등으로 인하여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였다. 이후 1950년 2월 호남지구의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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