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보호의
(浸透保護衣, Permeable Protective Clothing)
화학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착용하는 특수 피복을 가리킨다. 화학제로 처리되어 있으며, 수포성 화학작용제와 같이 피부 침투를 통하여 인체에 중독증상을 일으킬 수 있는 화학작용제애 대하여 방호를 제공한다. 한국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침투보호의의 경우 화학작용제에 의한 오염이 일어났을 경우 오염지대 내에서 24시간 정도의 착용이 가능하며, 착용 후의 세탁 및 제독은 불가능하다. 구성품으로는 전투화 덮개와 보호장갑이 있으며, 이들은 오염지대에서 6시간 이상의 방호가 가능하다.
카사블랑카회담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이었던 1943년 1월 14일에서 동월 24일까지 프랑스령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개최된 회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이 참가하여 회담을 열었으며, 전쟁의 목적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임을 명확히 하여 추축국에 대한 전쟁을 무조건 항복시까지 계속할 것임을 확정하였고, 유럽 진공작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어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 본토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과 더불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개략적인 상륙시기 등이 정해졌다. 또한 프랑스 항전파 지도자들간의 화해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카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지기 얼마 전인 1905년 7월 29일, 당시의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였던 태프트 육군장관 사이에 이루어진 비밀협약을 가리킨다. 밀약 내용 중의 하나인 극동의 평화를 위하여 미, 영, 일 3국이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확립할 것을 통해 이전의 영일동맹을 확장하였으며,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일본이 묵인하는 동시에 그 교환조건으로 한국에서 지금까지 얻어낸 우선권을 미국으로 하여금 보장케 하는 동시에 한국을 일본이 지배하는 데 대하여 미국으로부터 양해를 얻어냈다. 이 밀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을사조약이 맺어짐으로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겨 실질적인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후 완전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된다.
카이로회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개최되었던 연합국 수뇌회담. 1943년 11월 22일부터 동월 26일까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개최되었으며,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졔스 총통이 참석하였다. 대 일본 전쟁 수행을 위한 협력 및 영토문제 등을 비롯한 전후 처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검토한 최초의 회담으로, 이 회담의 결과로 11월 27일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었다. 선언문에서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될 때까지 연합국이 협력하여 싸울 것을 천명하였으며, 전쟁에 이긴 후에도 연합국은 자국의 영토확장을 도모하지 않고 오직 일본이 타국에서 약탈한 영토를 원 소속국가에 돌려줄 것을 결의하여 태평양에 있는 일본령 제도의 박탈, 일본이 중국에서 빼앗은 모든 영토의 반환을 언급하였으며, 한국에 대하여 특별한 조항을 넣어 현재 한국 인민이 노예상태 하에 있음에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 독립 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라고 선언문에 명시함으로써 한일합방 이후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카이로 회담의 선언사항은 이후 포츠담 회담 및 그 선언문에서 다시 한 번 이를 지킬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 사이에 열렸던 테헤란 회담 이후 테헤란 회담에서의 합의사항(터키에 참전을 권유할 것) 이행을 위하여 1943년 12월 3일부터 동월 6일까지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의 수뇌가 터키 대통령과 회담을 벌였으나, 터키는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중립을 지켰다. 이 회담을 11월의 회담와 구분하기 위하여 이를 제 2차 카이로회담이라 하며 11월의 회의는 제 1차 카이로회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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